리버풀 역사(중편)-영광의 시대와 2개의 비극

June 09, 2021 · 2 mins read

1. 밥 페이즐리 감독

지난 번 글에 이어서 리버풀FC 역사를 소개하겠습니다. 빌 샹클리 감독이 은퇴하고 나서 수석코치였던 밥 페이즐리가 리버풀 감독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리빌딩이 잘된 팀이어서 페이즐리는 화려한 선수층과 코치진을 보유했었습니다. 비록 간판스타 ‘케빈 키건’ 선수를 독일 ‘함부르크SV’로 팔았지만 ‘케니 달글리쉬’(지금까지도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공격수를 영입했습니다.

2. 케니 달글리쉬의 활약

달글리쉬는 이적하자마자 엄청난 활약을 하며 이 시기에 리버풀은 ‘붉은제국’이라 불리며 유럽 최정상의 클럽이 되었습니다. 밥 페이즐리 감독은 팀의 최전성기를 이끌었고 9년의 재임기간동안 리그 6회, 유러피언 컵 3회, UEFA컵 1회, 리그 컵 3회, 채리티 실드 6회, UEFA슈퍼컵 1회라는 총 20회의 우승을 기록하고 은퇴를 합니다.

밥 페이즐리

83-84시즌 후임 감독은 수석코치였던 ‘조 페이건’이 됩니다. 부임하자마자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AS로마를 만나 승부차기로 승리하여 4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을 들어올립니다. 리버풀은 84-85시즌 리그에서 아쉽게도 지역더비 팀인 ‘에버튼FC’에게 밀려 2위를 하게 됐지만 1985년 5월 29일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이탈리아의 강호 유벤투스와 만났습니다. 팬들은 5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을 기대했지만 유벤투스의 프랑스 선수인 ‘미셸 플라티니’에게 결승골 내줘 패배했습니다. 그런데 우승을 했지만 관중석에서는 ‘헤이젤 참사’라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3. 헤이젤 참사

헤이젤 참사는 1985년 5월 29일 벨기에의 브뤼셀(영어로는 헤이젤-Heysel)에 위치한 경기장에서 훌리건들의 난동으로 경기장의 구조물이 무너져 39명이 숨지고 600명이상이 부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양 팀의 서포터들은 폭력적인 성향이 강했고 경기가 시작되자 싸움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 싸움으로 인해 29명의 훌리건이 구속이 되고 잉글랜드리그 팀 전체에게 5년간 국제대회 출전 금지와 리버풀은 향후 7년 간 국제대회 금지라는 중징계가 내려졌습니다.

헤이젤 참사

1985년 헤이젤 참사 추모식에 참석한 관계자들 (왼쪽에서 부터 5번째 인물이 케니 달글리시)

이후 ‘조 페이건’ 감독은 은퇴를 하고 ‘케니 달글리쉬’가 선수이면서 감독인 플레잉코치를 맡아 팀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달글리쉬는 리그와 FA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팀을 잘 이끌고 있었는데 축구 역사상 최악의 사고인 ‘힐스버러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4. 힐스버러 참사

힐스버러 참사는 1989년 4월 15일 영국 잉글랜드 셰필드에 있는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관람객이 압사한 사건입니다. 관람객 수용가능인원을 초과해서 입장시켜 경기장 구조물이 무너지면서 큰 희생이 발생했습니다. 1,600명 입식관중석에 3,000명이 들어가게 되었고 훌리건 문제로 설치한 보호철망으로 인해 94명이 압사하고 부상자는 766명, 2명은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되면서 사망자는 96명이 되었습니다.

힐스버러 참사

힐스버러 참사 이후 23년만인 2012년 9월 12일에 발표된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경찰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진술서를 조작했고 당시 영국총리인 마가렛 대처는 경찰들을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비호를 했습니다.

마가렛 대처 : 영국 최초 여성 총리이자 강대국 최초의 평민 출신 여성정치인으로서 ‘앙겔라 메르켈’과 ‘테레사 메이’ 이전에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신자유주의의 상징적인 인물.

힐스버러 참사 후유증으로 1990/1991 시즌 도중에 케니 달글리쉬 감독은 자진 사임을 했고 이는 리버풀에겐 길고긴 침체기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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